J J 벨테브레(1595?). 헨드릭 하멜보다 26년 먼저 조선 땅을 밟은 네덜란드인이다. 유명한 하멜 표류기와 일부 사료가 남아 있긴 하지만 기록은 미미하다. 역사의 비어 있는 공간은 소설가의 상상력이 채운다. 김경욱(36) 씨가 이 일을 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 생김새도 전혀 닮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흘러들어온 이국의 사내가, 박연이라는 조선 이름을 얻고 조선인과 어울려 대포를 만들고 조선 군사와 함께 병자호란에 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소설로 썼다. 장편 천년의 왕국이다.
김경욱 씨는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등을 통해 영화적 상상력을 소설에 끌어들인 작가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역사소설에 뛰어든 것은 낯설다. 그런데 잘 읽힌다. 김훈 씨를 떠올리게 하는 단문의 의고체 문장(작가 자신도 부정하는 대신 좋아하는 작가의 영향을 받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조선인이 아닌 벨테브레를 화자로 삼아 이방인의 눈으로 본 조선의 풍경을 낯설게 그린 시도 등이 속도감을 높여준다.
1627년 네덜란드 국적의 우베르케르크호가 인도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한다. 해상무역이 활발했던 때이다. 폭풍우를 만나 낯선 땅에 표착했을 때 선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3명. 벨테브레와 요리사 에보켄, 소년 선원 데니슨은 인조의 뜻에 따라 도성 수비대에 배속된다. 넉살 좋은 에보켄은 이국 생활에 잘 적응하지만 어린 데니슨에게 낯선 땅은 정 붙이기 쉽지 않다. 데니슨은 탈출을 감행하다 죽임을 당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상상도 못했을 상황에 처한 벨테브레의 심정이 헤아려진다. 작가 자신 신이 왜 내게 이런 장난 같은 운명을 주었을까 고민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그 불가해한 운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설명한 터다. 실제로 처음 벨테브레의 눈에 비친 조선은 한없이 기이한 곳이다. 이 왕국의 이교도들은 태양의 뜨거움과 달의 차가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극단을 쉬이 넘나드는 저들의 병적인 활달이 나는 두려웠다. 그렇지만 화포장 영감을 도와 대포를 만들고 생활풍속과 윤리, 종교 등을 익히면서, 조선은 갈수록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은 곳이 된다. 이방인의 이러한 마음의 흐름을 작가는 비장한 문체로 묘사한다.
김훈 씨의 남한산성, 신경숙 씨의 리진 등 역사에서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끌어내는 뉴에이지 역사소설(평론가 서영채)이 최근의 새로운 경향이다. 김경욱 씨의 소설은 21세기와 어떤 연관을 가질까. 작가는 박연의 삶은 국경이 무의미한 오늘날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화합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국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몸을 섞어간 벨테브레는 세계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