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잔디에 드러누웠던 적이 있었다. 문득 올려다보니 나뭇가지에 누군가 절망이라고 새겨놓은 게 아닌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번역본과 대조하며 읽고 또 읽었다.
꼿꼿한 기독교인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지명관(82사진) 전 한림대 교수. 그는 이 자서전에서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와의 투쟁의 한가운데를 헤쳐 온 지식인의 자화상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나는 언제나 현실 속에 뛰어들어 살아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고 이른바 학문의 세계로 도피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고민해왔다.
1924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에게 광복의 감격은 또 다른 절망에 불과했다. 극심한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 아버지처럼 따르던 선생님과 결별해야 했고, 잔인한 전쟁 속에서 미쳐버린 대학 동기생을 보면서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를 되물어야 했다.
문학청년이었다가 419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회참여 지식인으로 나선 그는 1964년 7월 대학 강단에서 물러나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사상계의 주간을 맡았다. 당시 사상계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기개 높은 민족주의자로 한일협정에 반대해 치열하게 싸운 장준하는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장준하는 한일협정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지명관,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등 세 사람을 일본에 보낸다.
당시 열흘간의 일본 여행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놓았다. 미국 유학, 유럽, 중동 여행을 하며 사상적으로 큰 변화를 겪은 그는 숨 막히는 유신정권을 피해 197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 후 20년간 도쿄에서 망명객 생활을 한다.
지식인이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에 있어서 어떻게 휴머니티를 위하고 있는가 하는 자세에서 바라봐야 될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인가. 무엇에 대하여 항거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사상계 1966년 9월호)
그는 1973년 5월 일본 세카이의 편집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의 권고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TK생이라는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필자에 대한 수많은 억측을 낳았던 통신은 1988년 3월까지 무려 15년간 계속됐다. 이 통신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독재정권 반대 투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기독교 네트워크를 통해 국제적인 지원과 연대를 이뤄내는 역할을 했다.
격동의 세월을 돌아보면서 지 교수는 모든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는 정치 철학자 해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철학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으면 묵묵히 바른 정치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소리를 높여 쇄신을 선언하는 것일까. 모두가 정권만 잡으면 뜨뜻미지근한 개혁은 혐오하고 전혀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새로운 세력은 그들이 내걸었던 구호에 의해 도리어 자신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
지 교수는 이 책에서 이 시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 대 혁명적 저항세력이라는 비타협적 대결구도를 극복한 이후의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며 상대를 적과 우군으로 나누어 온 시대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그것이라고 강조한다.
“有一年春天,我在校园里找到一片有树阴的草地躺了下来。偶然间抬头一看,发现树上刻着‘绝望’两个字。我吓得跳了起来。……我对照齐克果的《致死之病》译文读了又读。”
前翰林大学教授池明观(82岁,照片)是一个正直的基督教徒和知识分子。他在自传中画出了一个经历殖民地争夺、分裂、战争以及与独裁的斗争的知识分子的自画像。他说:“我是勇敢地面对现实,还是闭着眼睛逃到所谓的知识世界,为这个二选一的问题苦恼了很久。”
1924年,他出生于平北睛州。对他而言,光复的喜悦只不过是另一种绝望。由于左右思想意识对立严重,他不得不与如同父亲一样的老师诀别。而看到在残酷的战争中精神失常的大学同学,他自问是不是个正常人。
他原是一名文学青年,但以4.19革命为契机转变成参与社会的知识分子。1964年7月,他离开大学讲坛,在张俊河先生创办的《思想界》担任主编。当时,《思想界》是韩日协定反对运动的中心。但作为轻易不言败的民族主义者,强烈反对韩日协定的张俊河还是一个对时代变化灵活应变的冷静的现实主义者。张俊河为迎接“韩日协定时代”,将池明观、金俊烨(前高丽大学校长)等三人派往日本。
在日本的10天旅行彻底改变了他的人生。在去美国留学和游览中东的过程中,他的思想发生了翻天覆地的变化。他逃避让人窒息的维新政权,于1972年到日本留学,此后,在东京度过了20年的岁月。
“知识分子不会被自己的思想意识左右。要从在那个社会如何实现博爱的角度出发评价知识分子。要思考从什么人的手中解放人民,要与谁相抗衡。”(《思想界》1966年9月号)
1973年5月,在日本《世界》杂志总编安江良介的劝告下,他开始以“T·K生”的笔名撰写《来自韩国的通信》。让人对笔者产生无数猜测的《通信》直到1988年3月才全部完工,持续了15年。该《通信》起到了向全世界宣传韩国的民主化运动和独裁政权反对斗争,并通过基督教网络与国际援助形成联盟的作用。
池明观说,回忆起激动的岁月,对政治哲学家汉娜·阿伦特的全体主义批评哲学:“一切革命都是失败的革命”更有感触。
“为何韩国政治家一旦执政,就想方设法引起别人的反感,鼓励他们推翻自己,而不是默默地为国民服务。无论是谁,只要掌权,就放弃循序渐进的改革,立马成为追求新时代的革命家。不久后,新势力因自己提出的口号,受到了审判。”
池明观在这本书中对当今时代知识分子的作用说:“克服家长权威主义体制对革命抵抗势力这一非妥协性对决格局的民主主义非常重要。他们要克服把对方分为敌我双方的时代。”